



한 남자와의 상담
기록 CASE. A524-1
안녕하십니까, 각성자 관리실장 송태원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요.
언제나 그렇듯 여러분은 연구해야 할 것이 있겠지요. 저로 인해 성과를 보인다면 그것은 기쁜 일일 터이니 흔쾌히 협조하긴 했습니다만, 갑자기 제 얘기를 듣고 싶다 하는 저의는 잘 모르겠군요, 정말 쓸모없는....지금 제 자료가 연구되고 있으니 쓸모없지는 않겠군요, 저는 이 이상한 기시감을 지우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서 제 이야기를 말해보라고 하니 참 묘한 기분입니다. 이런 걸 듣는 것이 의사이자 연구자인 당신의 일이겠지만 지루해진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시간이 많고 당신은 분명 이것 외에도 할 일이 더 있을 겁니다.
저는 사실 이름도 송태원이 아닙니다. 알렉스가 제 어머니가 지은 이름이고 개명했던 적은 분명 없지만, 저는 이 이름을 제 이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찾아보니 동양의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이더군요. 이미 세계가 한 나라로 통합된 이상 국가는 의미가 없지만 제가 그걸 스스로의 이름으로 인식한다는 점은 분명 이상했습니다. 저는 그 이름을 곱씹었고, 이내 대학을 졸업하고 그 나라로 짧은 자유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몇 번이고 알렉스인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을 할 생각을 못했던 것과, 전혀 배우지 않은 나라의 언어-아마도 한국어인 것 같습니다-의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 그리고 평화와 안정적인 상황에 계속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알 수 없는 피곤함을 느끼는 증상에 몇 번 이곳을 들러 처방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저는 소중한 가족들의 응원 덕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생물학 석사 과정을 밟기 전에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은 무엇하러 그 작은 반도에 가냐고 의문했지만,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일생동안 저를 붙잡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기 위해 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처음 비행기에 타고 떠오르던 순간, 그 흥분감은 당신도 아실 겁니다. 이 큰 기체가 떠오른다는 경외감과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난다는 낯선 느낌. 저도 그것이 느껴지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에 타고 이륙하는 순간 저는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무덤덤했고 흔들리는 비행기에 울리는 몸의 진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허벅지와 좌석에 남는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원래 이렇게 자리가 여유있게 남지 않았었는데,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공간은 그렇게 많이 남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겨우 끼인다는 느낌을 면할 정도의 공간이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방의 작은 국가였던 지역에 가까워지면서, 이탈리아의 모양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두껍고 역동적이고, 숲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고, 제가 살다 온 곳과는 정반대의 지형이었지만 친숙했습니다. 저는 공항에 내려 짐을 찾았고, 택시를 잡아 서울역으로 가 달라고 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저는 제가 한국어로 기사님과 대화했다는 사실도 내리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근처의 호텔에 짐을 풀고, 저는 천천히 그곳을 돌아보았습니다. 회색 아스팔트와 살던 곳보다 좁고 높게 지어져 있는 건물들, 늘 바쁘게 사는 사람들, 급하게 뛰면서 절 치고 간 학생을 돌아보자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앞의 버스를 잡기 위해 달렸습니다. 저는 계속 걸었습니다. 그러자 둥근 돔이 올라앉아 있는 서울 시청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주변이 너무 낯익었지만 동시에 낯설었습니다. 분명히 이곳엔 각성자 관리센터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나서, 제가 있는 이곳은 아직 던전 브레이크도, 각성자도 없다는 사실이 누군가 망치로 두드린 듯이 틀어박혔습니다. 저는 당황했습니다. 송태원, 이라는 이름을 입 안에서 곱씹어 보았습니다. 각성자 관리실장이라는 직책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채로 계속 그 근처를 살펴보았습니다....
아, 혹시 제가 너무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괜찮다고요, 감사합니다. 지금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한 적도 없거니와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약간 격양되었던 것 같네요, 계속 할까요? 네, 그럼.
저는 무작정 거리로 나왔습니다. 마침 경찰이 보였습니다. 형광조끼와 황금색 독수리 문양이 반가웠습니다. 학생들 몇몇을 모아놓고 훈계하고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과하게 개조한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으면서도 힐끔힐끔 경찰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중 머리를 밝게 물들이고 화려하게 입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뭔가의 기시감에 또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리치면서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습니다. 경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들은 그 틈에 달아났습니다. 경찰은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아니꼬운 표정을 하면서 무전기를 켰습니다. 높낮이가 변하는 연결음이 귀에 익었습니다. 경찰은 고민하는 표정을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전기를 집어넣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안 가십니까? 그는 제가 말을 걸지는 몰랐다는 듯 약간 놀랐습니다. 저를 수상하게 쳐다보다가 그는 머쓱하게 경찰 조끼를 툭툭 털었습니다. 저놈 중 한 명이 제 동생이거든요, 집에 가서 따끔하게 혼내 줘야죠.... 머리도 염색한 거 봐요, 할거면 예쁜 갈색이나 할 것이지 어울리지도 않는 금색으로 쫙....그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어 올렸습니다. 밝은 머리던 그의 동생과는 다르게 그와 잘 어울리는 흑발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이름을 생각해냈습니다. 혹시 여기서 세성 길드로 어떻게 가는지 아십니까? 네? 세성 길드요? 청년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대신 현충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청년의 친절한 설명에 버스를 잡아 타면서, 기억이 점점 선명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충원에 도착한 저는 너무 자주 와 익숙한 지리를 기억하면서 길드가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각성자 관리실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에는 큰 쇼핑센터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애완동물 입장이 가능한 곳인지 동물들을 데리고 온 사람도 꽤나 많았습니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주로 보였고, 남매든 자매든 형제든 사이좋아 보이는 이도 있었고 죽일 듯이 싸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혈육들이 다 그런 사이겠지만, 저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세 사람을 더 떠올려 냈습니다. 벤치에 앉아 그 생각을 이어가려고 애쓰자 그들과 연관된 사람의 얼굴들이 포도송이마냥 줄줄이 딸려왔습니다. 개중에는 얼굴이 기억나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같이 있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들은 분명 저를 송태원, 각성자 관리실장, 송 실장, 실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뚜렷하지 않은 기억들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습니다. 필름을 덧씌운 듯 흐릿하게 그리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제 앞을 휙휙 스쳐 갔고, 저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중 아무도 제가 떠올리는 얼굴이 없다는 것에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자문하면서 저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되돌려가며 이유를 알기 위해 애썼습니다. 언제부터 이 기시감을 느꼈던 것인지 찾으려 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알렉스로 있었고, 주변에서 모두 송태원의 삶을 부정하는 바람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현실에 자신을 밀어넣어 살아 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없고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계속 갔습니다. 빨간 소화기만 덩그러니 있는 어떤 좁은 모퉁이에 이마를 대고 섰습니다. 익숙한 타국에서 혼자가 된 순간, 기억은 더욱 선명히 떠올랐고 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솔직히 망상인지 기억인지 저도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래도 만일 들어주실 거라면,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저만은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듣다가 제가 정말 미친 거라고 판단하신다면 이야기를 끊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입을 다물고 당신의 진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은 바쁜 사람이고 저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계속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송태원은 한국에서 태어난 S급 각성자였습니다. 각성자라는 개념을 설명해드리자면, 어느날 각성한 초능력자 같은 겁니다. 원래 초능력자인 사람도 있고, 나중에 각성한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태생 S급이라고 칭하고 저는 후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들을....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비각성자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강한 힘은 괴물이 출몰하던 당시 한국에서 환영받았지만 저는 그것이 별로 부럽지 않았습니다. S급이 되면 달라질까, 싶었지만 혐오감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습니다. 일반인은 S급의 눈에 개미만도 못하게 보인다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저는 경찰이었고, 평생을 약자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S급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더군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더 많은 부를, 더 많은 욕심을, 더 많은 권력을 원하지 않느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오기였지만, 저는 그러기 싫었습니다. 오히려 더 결벽적으로 그것들을 피하려 했죠. 주제도 모르는 각성자들이 싫었습니다. 주제를 알고 교묘히 이용해 먹는 S급들은 더 싫었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괴물들 주제에, 인간인 척 하고 세상을 지킨다는 명목을 챙기는 게 혐오스러웠습니다. 끔찍한 위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죽는 것에 있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들과 일반인은 다른 생물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들을 혐오하고, 경계했습니다. 아마 한유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정말 겉가죽만 뒤집어 쓴 괴물 같던 한유현이 제 형만 나타나면 그렇게 순하게 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 역시도 위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S급에게도 사회적 평판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석시명이 제안한 이미지 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유현이 한유진을 통해 보통 인간처럼 고통스러워하고 바닥을 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정을 갈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 가질 수 있는 힘과 위치에 있는 사람이 겨우 한 사람 때문에 비명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유진 씨는 신기한 사람이었습니다. 끔찍하게 제 몸을 생각하던 사람이 스스로를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그 자신도 너무 상냥했기 때문에, 몸을 아끼지 않고 S급들을 위했습니다. 그들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던 결핍을 깨닫게 해버린 겁니다. 마침내 S급들은 한유진을 중심으로 세계를 안정화시키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뭉쳤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들 사이에 오갔던 일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건 제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키는 것. 한유진 씨와 항상 불가피하게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한유진 씨와 저를 포함한 S급들은 던전에 모였습니다. 때는 보름이었고, 아마 저는 그 때도 기시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다 눈이 마주친 성현제는 조용히 웃어보였습니다. 고요한 달빛 아래 벌레만이 찌륵이는 침묵이 지나고, 꽉 차게 떠 있던 보름달이 갑자기 웃었습니다. 뾰족한 초승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귀가 찢어지는 휘파람소리와 세게 불던 바람이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그들은 생각보다 더 엄청났습니다, 할 수 있는 각오와 준비를 모두 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버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한유현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한유진이 제 옆으로 달려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한유현은 순간 모든 방어를 포기하고 형에게 달려들었고, 한유진의 앞에 반투명한 네모가 크게 열렸다 닫혔습니다. 하얀 선이 튀어나오면서 네모진 것이 반짝였고 한유진은 비틀거리며 뒤로 쓰러졌습니다. 최전방에 있던 저는 한유진에게 달려드는 금빛 창을 막았습니다. 그때 아마 팔꿈치가 박살났을 겁니다. 한유현이 한유진을 받아냈습니다. 검은 피를 토해내는 한유진에게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린 성현제가 와서 포션을 먹였습니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하얀 그물에 의해 공격이 잠시간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성현제는 한유진 씨가 자신의 증폭 수준을 최대치로 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효과적인 건 분명하지만 모든 S급들의 증폭을 감당하다간 부서질 거라고 했습니다. 한유현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습니다. 검이 열기에 녹아 피처럼 뚝뚝 흘렀습니다. 한유현이 밑바닥부터 끓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것을 혼자 맡을테니 형을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터무니없이 무모했습니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한유현은 한유진의 숨겨져 있는 스킬을 확신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한유진이 강화될 테니 잘 지키면서 싸우라고, 실패하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기희생과 S급이라니, 너무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닙니까. 한유현은 한유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글이글 끓는 것 같은 눈이 순식간에 애처롭게 잦아들었습니다. 그는 제게 힌유진 씨를 넘겼고 저는 잠자코 그의 몸을 받아들었습니다. 한 손에 잡히는 팔뚝이 이 사람이 어떻게 S급들을 끌고 여기까지 왔을까, 의문하게 했습니다.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말 강한 사람입니다. 한유현과 박예림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국 결론이 정해진 듯 박예림이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습니다. 한유현은 하얀색 텍스트에 갇힌 채 꿈틀대는 초승달을 바라봤습니다. 조용해진 그의 검에서 청염이 타올랐습니다. 초승달이 한번 꿈틀거릴 때마다 글자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박예림이 그 사이를 얼리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얼음이 생기는 족족 깨어졌습니다. 품 안에 안은 한유진 씨가 움찔거렸고 내려다본 그는 필사적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안돼……유현아……한유현……제발, 두 번은 안돼.”
한유진 씨는 눈을 뜨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를 추슬러 제 어깨에 기대게 해 주자 가빠진 그의 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습니다.
“들었습니까.”
“……당장 말려요.”
“제가 말린다고 되는 게 아닐 겁니다.”
그때 저는 그저 한유현의 말대로 한유진 씨를 잘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기세로 한유진 씨가 제 멱살을 잡아 당겼습니다. 제가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도리어 상체를 일으킨 한유진 씨의 눈에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에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못 보내요, 지킬 겁니다."
그 말을 한 한유진은 한유현과 놀랍도록 닮아 보였습니다. 저는 어떠한 깨달음이 벅차올라 등골부터 정수리까지 내달리는 걸 느꼈습니다. S급에게 서슴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강한 게 아니라, 강해진 걸 겁니다. 태생부터 강한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태생부터 S급이었던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들도 한 인간이고, 그렇게 외로운 이질감 속에서 살아왔던 겁니다. 한유진 씨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제 어깨를 부여잡고 일어섰습니다. 셔츠가 그의 손에서 잔뜩 우그러지는데 오히려 그의 손이 더 아파 보였습니다. 우그러진 셔츠같이, 비틀려져 있으면서도 한유진 씨는 숨을 몰아쉬면서 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격발음과 함께 한유현의 뒤통수 옆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거기 서. 한유현. 형 말 안 들을 거야? 형이 지켜준다고 했잖아. 한유진 씨가 다가가자 한유현이 움찔거렸습니다. 마치 목줄이 잡힌 맹견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얼어붙은 초승달이 눈을 부릅뜨며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초승달의 눈이 기이하게 굴러서 성현제에게 가 닿았습니다. 서리가 낀 금색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박자에 따라 성현제의 금색 체인이 흔들렸습니다. 그의 약하게 떨리는 턱선이 보였습니다. 문현아가 성현제에게 다가갔습니다. 질린다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너도 진짜 엄청난 거 달고 있네, 국내 헌터에다 해외 헌터도 모자라서 세계 바깥의 존재까지 붙여와?"
"그 정도로 인기가 많은 걸 어떡하겠나."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그래서 소장님! 어떡할거야? 예림이 한계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조금 더 할 수 있어요...!!"
박예림이 최선을 다해 초승달을 얼려두는 동안, 한유진 씨는 한유현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문현아는 초승달의 시야에서 성현제를 최대한 가리려고 섰습니다. 저는 누굴 지켜야 했을까요? 목적을 잃어버린 듯한 초조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덩달아 들었습니다. 세계가 끝나냐 유지되냐가 달려있는 이 최후의 전투에서, 그들이 서로를 지키려고 서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이 들었던 겁니다. 세상같이 거창한 것 보단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려고, 그 인간미 없던 사람들이 뭉치는 것에 눈이 개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겁니다. 한유진 씨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속에서 뜨거운 게 탁 퍼졌습니다.
발이 땅을 박차고 올랐습니다. 얼음 틈을 비집고 나온 가는 손가락에 정권을 질렀습니다. 눈앞에 얼음 가루가 튀기면서 손가락이 부러진 초승달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예림이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고 한유현이 그런 그녀를 지탱했습니다. 번쩍거리며 치는 벼락들을 성현제가 사슬을 휘둘러 바닥으로 흘려보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들 편에 서고, 그들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세계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검은 연기가 차올라 넘실대며 양 팔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때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깨져가는 얼음과 하얀 텍스트로 된 그물 사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박예림이 깜짝 놀라 얼음을 해제하려고 했지만 끔찍하게 우는 초승달의 비명에 그물이 흔들거리자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크게 외쳤습니다.
"공무원 아저씨!! 안 죽고 해낼 수 있죠?!"
저는 대답 대신 약탈을 최대한으로 개방했습니다. 커진 먹이에 약탈들이 신나하며 초승달을 타고 올랐습니다. 초승달의 긴 손이 그물을 뜯어내고 얼음을 부쉈지만 문현아가 손바닥에 창을 꽂았습니다. 초승달이 몸을 거칠게 흔들었습니다. 저는 초승달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검은 연기가 제 입과 코에서 새어 나왔습니다. 새어나오는 검은 연기를 보았습니다. 온몸이 검어졌고, 저와 초승달 모두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초승달은 허우적거렸지만 좁고 딱 붙은 공간에서 약탈은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했습니다. 초승달의 괴성과 함께 찌릿찌릿한 전류 역시도 몸을 때렸지만 저는 버텼습니다. 이까짓 전류 한두번 맞아본 것도 아니라며 버텼습니다. 성현제가 지금까지 벌여왔던 말썽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처럼만, 조금만, 초승달이 급속도로 빨려가는 자신의 힘에 기겁하며 통로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성현제가 던진 몇 개의 아이템이 날아와 깨지더니 형성된 포탈이 불안하게 흔들거렸습니다. 연기가 불안정하게 너울거렸습니다. 분노에 찬 하이톤의 휘파람을 마지막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번쩍번쩍 울리는 것 같은 번개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초승달과 함께 소멸한다면, 이상하게 고요해진 풍경 속에서 저 멀리에, 성현제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습니다. 문현아의 굳은 표정을 보았습니다. 익숙한 면면이었지만 떠오른 표정은 낯설었습니다. 그녀가 뭐라고 소리지르는 듯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초승달이 뒤척임이 전보다 약해진 게 느껴졌고, 저는 포탈에 절반 정도 몸을 걸친 그녀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조용해진 세상에서 안도감이 가득 마음을 채우는 걸 느꼈습니다. 제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가장 저답게 해주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고, 제 능력은 선한 일을 위해 쓰였습니다.
저는 그 구석에서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누구도 구하지 못하고 세계에 혼자 남는 것이었다는 걸 떠올렸습니다. 그것이 혼자 있을 때 기시감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모든 것을 잊으려 하던 이유였을 겁니다. 알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혹시라도 제가 저이길 포기했을까봐. 세계를 포기하고 혼자 살아남기를 택했을까봐 두려워서 말입니다.
미지막 전투가 어떻게 끝났을 것 같습니까? 초승달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탐욕스러움이 더 강할지 제 욕심이 더 강할지 줄다리기하면서 저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초승달은 은하수 같은 눈썹을 찌푸려 포탈에 팔을 넣으면서도 절 찌부러트리려 애썼습니다. 저는 그 하앟고 단단한 팔에 달라붙었습니다. 이것이 도망치기 전에 삼킬 수 있을지 가늠하면서 진짜 괴물을 지옥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예림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얼음 감옥을 끝까지 유지했고, 한유현과 성현제, 문현아는 집중되는 공격을 무력화하며 서로를 지켰습니다. 한유진은 네모 창을 띄우며 뭐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위험 요소는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속부터 무언가가 계속 차오르는 기분을 무시하고 저는 은연중에 지켜왔던 제 안의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제 속을 유지하던 액체들이 모조리 끓어올라 연기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숨을 내쉬자 몸 전체가 떨렸습니다. 더 이상 팔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형체인 검은 것에 접촉한 초승달이 끝부터 갈색으로 녹더니 먹물이 되며 녹아들었습니다. 그 장면이 흑백 무성 영화처럼 다가왔습니다.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숨을 몰아 쉬며 능력을 해제하려 들었습니다. 속이 메슥거리고 팔이 전류로 덜덜 떨렸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힘을 약탈한 탓인지, 능력에 저까지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럽고 흑백으로 흐린 시야에 내쉬는 숨이 검은 잿가루가 일렁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코피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저는 땅바닥에 고개를 박고 웅크렸습니다. 누군가 저를 툭 쳤다가 놀라 손을 떼는게 느껴졌습니다. 귀도 들리지 않고 시야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저는 약탈과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웅성거렸습니다. 불과 얼음이 뒤이어 제 등을 건드렸지만 그들도 오래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손이 닿고, 저를 포탈로 밀었습니다. 녹아내리던 저를 주워 집어넣었습니다.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어두워진 시야를 들어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고, 성현제는 제게 잘 보이도록 입 모양을 크게 하며 말했습니다.
"고맙네, 금방 갈 테니 기다려주게나."
......기억은 그곳에서 끝났습니다. 눈을 뜨니 백화점의 불이 꺼져 있었고 경비가 마지막 점검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구석에서 나오는 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시길래 정말 죄송하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밤거리를 걷는 내내 의심했습니다. 가로등 사이를 걸으면서도 내가 기억해 낸 것은 무엇인가, 나는 제정신이 맞는가 계속 의심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어디 있는지도, 제가 누굴 기억하는지도 그들이 심지어는 망상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지만 그냥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웃는 얼굴들이 떠오르고 간혹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이 덮쳐오는 불안에 피곤해 할 때도 있지만, 살다보면 항상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것들을 위해 사는 게 제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기억이 진짜라면 언젠가 그들이 절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전 그때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죠.
시간 내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올 때는 커피 믹스라도 사 들고 오겠습니다.
-2XXX 10. 21 기록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