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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 날은 만우절이었다.

바깥이 소란하여 서 밖으로 나갔을 때, 커다란 세단 한 대가 공중에서 느리게 떴다가 루프부터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은색 세단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에 세워진 순찰차와 충돌한 뒤 그대로 그것을 밀어내어 길게 바닥을 긁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송태원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사방에선 몇 개인지 모를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한 방향으로 일제히 달려가고 있었다. 이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무언가에 쫓기듯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고 개중에는 다친 사람도 드문드문 보였다. 한 남자가 셔츠를 둘둘 뭉쳐 피가 흐르는 자신의 머리에 대고 도로 한가운데를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송태원은 멍하니 눈으로 쫓았다. 마치 그 끝에 결승선이라도 그어져있기라도 한 듯 남자의 달리기는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제야 그는 이 긴박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 많은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지구대 안으로 들어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야?”

 

굉음을 듣고 달려 나온 사람들이 문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송태원의 어깨를 세게 밀쳐냈다. 우루루 뛰쳐나가는 이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 탓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공포에 질린 것인가 의심했지만 대체 무엇에? 두려워 할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덜컥 굳어버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는지 벨트를 추스리며 뒤늦게 나온 유 경사는 뒤집어진 세단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졌다. 어! 뭐야! 놀라 소리 지르며 그는 계단을 반쯤 뛰다시피 내려갔다. 송태원은 순간 제 앞을 스쳐가는 유 경사의 제복 셔츠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멈추게 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제 것이 아닌 듯, 허벅지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구겨진 순찰차의 뒤축을 확인하고 한껏 인상을 쓰던 유 경사가 이 모든 소란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과, 오른편 건물 사이로부터 사람 몸집의 5배 정도 되는 짐승이 뛰쳐나와 그를 머리부터 덥석 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힘이 좋아 지구대에 폭력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출동해 술 마신 젊은이들도 한 손으로 쉽게 진압하곤 했던 유 경사였다. 틈만 나면 그는 너구리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팔씨름을 요청했고 질 때마다 억울한 듯 ‘내가 작년에 허릴 다쳐서 그래.’ 라며 툴툴거렸다. ‘이게 살이 아니라 다 근육이야, 근육.’ 유 경사가 팽팽하게 둥근 배를 손바닥으로 턱턱 두드리며 주장하는 바는 하여튼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는 송태원 마저 고전할 정도로 악력이 좋았다.

그랬던 그가 짐승의 턱뼈에는 전혀 맥을 못 췄다. 짐승은 오만하게도 입 안에 든 것을 탐색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크게 턱을 움직였고 딱히 먹기 위해 문 것은 아니었는지 몇 번 더 씹다가 그를 툭 뱉었다. 그러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태원의 눈은 허리 밑으로만 온전한 몸이 주차장 바닥 위로 털썩 떨어지는 광경을 정직하게 담아냈다. 가느다란 목에 간신히 붙어있던 머리가 굵은 힘줄을 따라 두어 번 튀어 올랐다. 이게 살이 아니라 다 근육이야, 근육. 배가 뒤집히는 것 같이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려 송태원은 기침처럼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때 퍽 흥분한 듯 부산스레 머리를 흔들던 짐승의 누런 눈동자가 돌연, 송태원의 가슴께를 향했다. 시력이 좋지 않은지 그 시선은 탁하고 산만했다. 놈의 생김새는 늑대에 가까웠지만 몸에 비해 머리가 작은 편에 속했고 주둥이도 더 짧았다. 짐승의 떡 지고 거친 갈기 뒤로는 하얗게 질린 김 경장이 돌아오던 발걸음을 되돌려 천천히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송태원은 눈이 마주친 그를 향해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낫다. 무장하지도 않은 사람이 한두 명이 더 늘어난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니잖은가. 그는 짐승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옆에서 부들부들 떨며 울고 있는 남자에게 나지막히 말을 걸었다.

 

“이 순경님.”

 

“··· 어떡, 어떡해요. 어떡······.”

 

“진정하고 제 말을 들으십시오.”

 

“이씨발, 진정하게 생겼어?!”

 

“조용히······!”

 

순간, 큰소리에 반응하듯 콘크리트를 짓뭉개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짐승의 발톱이 두 사람 사이를 깊게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한 송태원은 곧장 현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땅에 가장 먼저 부딪힌 어깨가 곧장 얼얼하게 아팠지만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송 경장님···! 살려주세요! 송 경장님!!!”

 

이 순경이 마지막 순간 온 힘을 다해 내지른 비명에는 ‘살려 달라’는 요구가 무색하게 일말의 기대감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것이 ‘엄마야’ 같이 겁에 질린 사람이 낼 수 있는 반사적인 외마디에 가까웠음을 송태원은 알았는데도 무심코 뛰쳐나갈 뻔 했다. 까득, 하는 소리와 함께 껄떡거리며 넘어가는 숨소리가 서둘러 뒤를 잇지 않았더라면 멍청한 얼굴로 짐승의 아가리에 몸부터 던지고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 끓는 비명은 금세 멎었고 사위가 고요했다. 계단 아래로 몸을 숨긴 채 지구대 건물 안으로 반 쯤 들어간 짐승을 주시하며 가만히 권총을 쥐었다. 오늘 순찰 나가기 전에 제대로 장전된 것을 확인했으니 오차는 없을 터였다. 마음을 먹고 피탈방지끈을 끌러낸 다음으로는 고작 총기로 저 거대한 괴물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송태원은 숨을 멈추고 차가운 땀이 배어난 손을 바지에 빠르게 문지른 뒤 곧장 땅바닥에 두 발을 연달아 쏘았다. 공탄, 그리고 공포탄.

짐승은 총소리에 반응하듯 처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크륵, 하고 축축한 숨을 뱉는 놈의 커다란 입에는 아직도 찢어진 옷가지와 사람의 여분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머리가 인지하고 몸을 굳혀버리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탄창이 돌아 장전되었을 실탄의 무게를 인지하며 송태원의 검지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팔 전체에 무겁게 실리는 반동이 낯설다. 군복무를 제외하고 지난 3년 간 근무하며 실탄은커녕 총을 겨눠본 적조차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깨까지 밀려온 둔탁한 감각을 느낄 새라, 총을 맞고 짐승이 뒷걸음질 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송태원은 이를 악물고 계단 뒤에서 뛰쳐나왔다. 주차장에 널브러진 유 경사의 몸을 단번에 뛰어넘고, 그대로 도로를 향해 달려 나가면서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무딘 애를 썼다.

 

 

 

 

아버지는 조금 정신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태원이냐? 뒤에서 희미하게 갈작거리는 강아지 걸음소리가 들려와 송태원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웃음을 지었다. 은퇴 후 등산과 국궁이 취미가 된 아버지는 다행히도 아직 집 안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여기저기 전화오고 난리도 아니다. 서울에도 뭔 일이 났담서.”

 

“뉴스 틀어 놓으시고 절대 집 밖으로 나오시면 안돼요. 제가 곧 갈게요.”

 

“오긴 뭘 와. 그리고 지금은 정전이라 티브이도 못 본다. 답답해서 원····· 무사하면 됐다. 배터리 나가니까 이만···.”

 

“아버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철컥, 하고 통화가 끊겼다.

딱히 지적한 적 없지만, 그의 아버지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 더 이상 할 말이 없냐는 의미의 잠시간의 침묵을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종종 전화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고 끊어버리는 때가 잦았다. 이 때문에 가끔은 못 다한 말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전화를 거는 일도 있었다. 어디 전화뿐이랴. 특별히 주린 것도 아닌데 음식을 급히 먹다가 과식을 하거나, 무언가 잘 안 풀리면 일을 벌여놓은 그대로 내던져버리거나······. 모친은 사고로 운명하기 전까지도 모든 일에 쉴 새 없이 재촉하는 남편 덕분에 꽤 자주 골머리를 앓았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그런 일상일까?

 

그러지 좀 마세요. 언젠가 참다 참다 지나가는 말처럼,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러나 감히, 건넨 투정에 아버지는 송태원과 꼭 닮은 새카만 눈으로 마룻바닥을 쳐다보다가 아들의 뒤통수를 말없이 힘차게 쓰다듬었다. 손바닥만큼이나 거칠한 목소리로 그는 영 딴 소리를 주워 담았다. 너는 머리통이 예뻐. 이마도 예쁘고. 요즘 놈들은 군대 보낸다고 박박 깎아놓으면 영 볼품없어지던데 너는 그때도 인물이 잘났어. 네 사진 친구들한테 보여주면 딸 있는 놈들은 괜히 내 눈치보고 그랬지.

 

─며칠 전 이발소에서 단정히 다듬은 뒷목이 선득하다. 차가운 쇠기둥으로 두피부터 등골까지 궁굴리는 듯, 섬뜩하다 못해 아릿한 헛통증 마저 느껴졌다. 감각이 둔해진 손으로 더듬더듬 접속한 포털사이트 전면에는 전국 각지에서 본 적 없는 짐승들이 도심에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속보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울 교외의 고층 아파트를 기어오르는 거대한 원숭이 떼 사진을 본 직후, 송태원은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의심하지 말아라. 네 기분만 나빠지니까. 아버지가 습관처럼 훈계하던 말이었다고, 이 기억을 과거사로 머리에 담는 것조차 불경스러웠다. 아주 온건한 교살처럼 숨이 가만가만 막혀왔다. 패닉이 오는 것을 막는 방법이 뭐였지. 고르게 숨을 쉬고··· 고르게 숨을 쉬고······.

 

다시 전원을 켠 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길게 이어질 뿐 연결이 되는 일은 없었다.

 

 

 

 

훗날 [아침이 오지 않는 언덕]이라 불리게 될 던전의 입구로부터 건널목 하나만큼 떨어진 상가 건물 안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멈추기까지 숨어 있다가 틈을 타 빠져나온 이들 무리는 괴물들이 하나 둘 나타나던 의문의 구멍을 등진 채 조심스레 이동했다. 노인과 어린 아이들을 가운데 모아놓고 비교적 건장한 남자들이 가장자리를 감싼 무리의 모습은 어디서 많이 본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포화 끝에 브레이크, 그리고 몬스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와 던전 내부를 비운 뒤에는 게이트가 알아서 비 활성화된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나중 일이다. 때문에 이들은 푸른빛을 띠는 게이트의 의미를 알지 못해 잔뜩 긴장한 상태로 주변의 시신들을 피해가며 한 블록을 걸었다.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에 한 중년 여성이 중얼거렸다. 그냥 건물 안에 계속 있을 걸 그랬나 봐요. 던전이 바로 뒤에서 터져나간 만큼, 이들이 있는 장소로부터 가장 가까운 대피소는 앞으로 30분 가까이 걸어야 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이들은 자신들이 도망쳐 온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경찰 한 명과 마주쳤다. 구두 한 짝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텅 빈 도로 위에서 뜬금없이 나타난 그를 무리의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총을 빼들고 경계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벼운 환절기 제복 차림에 그마저도 제법 뒹군 듯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것이 누가 보아도 그는 근무 중인 병력이 아닌, 길을 잃은 시민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다가가 말을 걸기 망설였던 이유는 이들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위 ‘각성자’라는 신인류에 대해 소곤거리던 참이었기에 그랬다.

 

“그 사람들은 자기 힘을 주체 못한다면서. 말은 통하는 거야?”

“기사 보니까 다친 사람도 있대요. 괴물 말고, 사람한테 당해서.”

“에이 씨, 미친 거 아냐. 다 쏴 죽여야 해. 괴물새끼고 사람새끼고.”

 

잠깐만, 저 사람 발 보세요. 각성한 사람들은 콘크리트 땅 위에도 발자국을 남긴대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허연 먼지가 내려앉은 구두를 향했다. 포장된 도로는 제법 빠르게 타박이는 걸음에도 흠 하나 없이 단단하고 매끈했다. 그제야 앞장서서 걷던 남자는 안심한 듯 한숨 쉬더니 친근하게 손짓을 하며 경찰에게 다가갔다.

 

“여보세요, 아저씨. 문자 못 받았어요? 대피소는 이쪽······.”

 

가까이 다가올수록 경찰의 제복에 피가 꽤 묻어있는 것을 보여 남자의 미소와 말꼬리는 점차 흐려졌다. 뻗은 손이 무색하게 송태원은 남자의 앞을 휙 지나쳐갔다. 어어! 그와 거의 부딪힐 뻔한 무리의 사람이 펄쩍 뛰며 헉 소리를 지르는데도 마치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빠른 걸음으로 삽시간에 무리로부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사람들은 ‘미쳤나봐.’라며 웃었다.

 

 

 

 

엘리베이터 안내음처럼, 상공에서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죽으러가요?”

 

여기가, 어디지. 송태원은 잠시 멈춰야겠다고 결심한 후로도 서너 발자국 정도 더 걷고 나서야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밀려오는 것은 당혹감이었다. 언제부터 걷고 있었지? 어딜 향하고 있었지? 다리가 한참을 걸은 듯 무겁고 지쳐있었고 기억은 뜨겁게 달군 실로 얼음을 도려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녹은 마지막 단면만 남아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천천히 복기해보아도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들은 죄다 뭉개져있었고 군데군데 하얀 섬광 같은 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여봐요.”

 

거센 바람이 훅 밀려와 저도 모르게 황망한 얼굴로 팔을 들어올렸다. 하얀 운동화가 마치 바람을 타고 온 것처럼 허공을 툭툭 딛고 내려왔다.

살짝 비틀거리며 땅에 착지한 사람은 키가 크고, 선명한 인상의 여자였다. 양쪽 팔뚝 소매가 길게 찢어지고 바지 군데군데 그을음이 묻은 것을 제외하면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멀끔했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송태원을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제복에 자수로 새겨진 이름을 느리게 읽었다.

 

“송··· 태원씨.”

 

 

주다연이에요. 기억하실 필요는 없어요. 여자는 씨익 웃으며 새삼 거리를 두려는 듯 팔짱을 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딘가 불편하게 슬금슬금 움직이는 모습이 묘했다. 끈이 잘 묶인 하얀 운동화가 닿았다가 떨어져나간 바닥은 진흙탕을 힘껏 밟은 것처럼 움푹 패여 있었다.

 

“보니까 각성자는 아니네. 저 부탁 좀 드릴게요. 저쪽 모퉁이 돌면 보호자 없는 어린 남자애가 하나 있는데, 걔 좀 데리고 돌아가 줄래요? 제가 지금 뭘 만질 수가 없어서.”

 

“·······.”

 

“혹시 공황이라든가, 그런 상태예요?”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에 여자는 그럴 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후, 나는 자살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았어요. 위험한 쪽으로 아주 망설임 없이 걸어가길래···. 아무튼 움직일 수 있죠? 그럼 좀 도와주세요. 경찰이잖아요.”

 

따라오라는 듯 고개 짓을 하며 여자는 먼저 휙 뒤돌았다. 사뿐히 걷는 걸음마다 진땅을 딛는 듯 콘크리트에 둥근 발자국이 남았다. 머리가 아직 멍한 탓에 송태원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라곤 그것이 아주 이상한 일이라는 것 정도였다. 꿈결 같은 와중에도 저 멀리서 새어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송태원은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도로변에 있는 프렌차이즈 카페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벽에 기대어 있었는데, 옷차림을 봐서는 보호자와 함께 있다가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였다.

웅크려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뭔가 입에 물릴 단 것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잡히는 거라곤 실탄이 장전된 권총뿐이었다. 아이는 어른을 만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보란 듯 더 서럽고 크게 울어댔는데 한편으로는 커다란 경찰 아저씨에 대한 편견으로 겁먹은 것 같기도 했다. 보다 못한 주다연이 슬쩍 옆에서 던진 ‘엄마’ 나 ‘집으로 가자’는 말을 한 문장에 두 번씩 넣어가며 등을 토닥이자 아이는 주다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송태원의 제복 어깨에 붙은 패치를 움켜쥐며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저, 조깅하고 있었거든요.”

 

대피소로 향하는 길에 울다 진이 빠졌는지 아이는 금세 송태원의 등 위에서 잠들었다. 날아가면 금방일 텐데, 조절이 안 되겠지. 주다연은 여전히 팔짱 낀 자세를 고수하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대뜸 말했다.

 

“대회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서요. 한 시간 정도 한강변을 쭉 달리는데 성수대교쯤인가··· 갑자기 차 경적소리가 한꺼번에 들리는 거예요. 보니까 엄청 크고 빨간 새가 다리 위에서 난리를 치고 있더라고요.”

 

“새 말입니까?”

 

“네. 오는 길에 얼핏 듣기로 이 근처는 늑대 같은 게 떼로 나왔다고 하던데. 여튼 그 큰 새가 부리로 자동차를 집어서 흔들고··· 도망치는 사람들 밟고··· 아수라장이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빽, 하고 괴성을 지르는데─ 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그때 머리가 다 터져버렸어요.”

 

주다연은 아이가 잠든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무슨 공갈빵처럼요. 저만 멀쩡했죠.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요. 그러더니······ 곧바로 메세지 창이 뜨더라고요. 이건 아마 제대로 보도가 안됐을 텐데. 워낙 허무맹랑하게 들릴 거라.”

 

“······.”

 

“게임 같더라고요. 스탯이랑, 그러니까 기본 체력 같은 거··· 그리고 스킬이 뭐가 있는지, 등급이 어떤지,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설명이 적힌 안내 창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몇 년 전에 RPG 게임을 좀 팠었는데, 그때 감으로 스킬을 쓰기 시작했어요. 대충 때려잡아도 되는 것 같긴 했는데 몬스터들 등급은 어떤지 모르니까 원거리로 계속 죽였죠. 얼핏 봤겠지만 저는 대기를 이렇게 저렇게 뭐, 할 수 있거든요.”

 

주다연이 방금 전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하듯 땅으로부터 50센치 정도 떠올랐다가 부드럽게 다시 내려왔다. 조금 더 깊게 남은 발자국으로부터 다시 발을 떼며 그녀는 표정을 찡그렸다.

 

“슬슬 머리가 아프네. 마나 때문인 것 같은데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한강이 정리된 뒤엔 곧장 종각으로, 거기도 난리 났다 길래 서둘러 날아갔죠. 그땐 그냥 다른 각성자들 따라 간 거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종각 말고 여기로 올 걸 그랬어요. 상황은 여기가 훨씬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종각은 어떻던가요.”

 

“가니까 각성자들이 이미 꽤 있었어요. 근데 한 명이 계속 광역으로 스킬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어 대서 다들 접근을 못하고 보신각 뒤에서 구경만 하지 뭐예요. 그 사람도 막 각성한 것 같긴 했는데 어휴, 어찌나 살벌한지 제 스킬을 얹었다간 몬스터랑 같이 지져지겠더라고요. 일반인도 휘말리는 거 보니까 좀 겁나기도 해서··· 일단 자리를 떴어요. 그리고 여기로 온 거예요. 여긴 애들이 많은 지역이니까 혹시 미아라도 있나 싶어서.”

 

둘이나 있더라고요. 주다연은 송태원과 등에 업힌 아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송태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그녀는 이내 서서히 미소를 잃어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멈춰 섰다.

 

“일반인이 죽었습니까? 사람 손에?”

 

“그게요.”

 

난처한 듯 어······ 하며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주다연을 송태원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송태원 씨.”

 

“······.”

 

“제 말 잘 들으세요.”

 

“······.”

 

“지금 당장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업었던 것처럼.”

 

“왜 그래야 합니까.”

 

“말할 테니까 일단 해요.”

 

검은 눈이 주다연을 응시했다. 눈밭에 무겁게 남은 발자국 같이 경계가 선명한 검은 자였다. 송태원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잠든 아이를 땅바닥 위에 눕혀 놓고 다시 일어났다. 주다연은 그동안 주먹을 한껏 쥔 채로 그 모든 동작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가 그에게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씀하십시오.”

 

“······ 처음엔 어디 걸려서 찢어진 줄 알았어요.”

 

“뭐가 말입니까.”

 

“당신 제복. 옆구리 쪽이요.”

 

송태원은 새삼 고개를 떨궈 제 차림을 확인했다. 제복 상의는 푸른색 옷감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구겨진 오른쪽 허리 부근 천에는 담뱃불로 지진 듯 둥글게 뚫린 흠이 나 있다.

 

“그거 총 자국이죠?”

 

“······.”

 

“······.”

 

 

순간 송태원은 그 누구보다 한 발 먼저, 높은 곳에서 거꾸로 내려 꽂히는 것 같은 아득한 공포감에 머리를 담갔다. 천천히 먼지와 피가 엉겨 굳은 구두를 들어 올리자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는 꼭 제 발 사이즈만한 자국이 찍혀있었다. 직후, 아주 멀리서 하늘에서는 수를 놓는 듯한 벼락이 내려쳤다. 자연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인격과 제스처가 느껴지는.

 

 

“언제 각성한 건지, 기억 안 나요?”

 

 

 

 

 

지구대 안에는 송태원이 들어오기 전부터 벽 한 구석을 차지하던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거울 밑단에 금색 궁서체로 기증자인 모 은행의 지부장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이 오래된 대형 좌경은 최근 지구대가 리모델링을 하며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참이다.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지구대 밖에 내놓은 이 거울은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꽤 오래 현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고 일단 놓여 있으니 다들 오며 가며 담배를 피우다가도 거울을 살피곤 했다. 습관처럼.

 

.

 

송태원이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그가 꿈속에서 멀찍이 물러선 채 타인을 응시하듯 방관하던 것과 같았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어 땅바닥에 효력 없는 두 발을 먼저 쏘고 곧장 자신의 옆구리에 실탄을 조준했다.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그는 비로소 툭, 반대편 손에 들려있던 이 순경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것을 이 순경이라고 불러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유효한 아픔도 없이 납작해진 총알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머릿속에서 하얀 섬광이 소리 없이 스며들듯 퍼져나가며 이내 온몸에서 거친 갈기처럼 검게 피어오르던 그림자의 숨을 죽였다. 몸이 매우 가벼워진 데에 반해 머리는 추를 매단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무감한 눈을 깜빡이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지구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어되지 않는 몸 때문에 송태원은 자택으로 돌아오는 수십 킬로 동안 많은 것을 망가뜨려야 했다. 비단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을 정도로 불친절한 스킬 설명 창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그것을 컨트롤해보려 할수록 몸의 중량은 고장 난 계기판처럼 삽시간에 양극단을 오갔다. 조심스레 내딛은 발이 갑자기 땅을 부쉈고 막상 힘을 줘 빼내려고 하면 꼼짝도 하지 않았다가 생각을 그만두자마자 다시 말도 안 되게 무거워졌다. 놀리는 것만 같았다. 와중에 검은 그림자는 외피가 뒤집혀 태어난 고슴도치같이 외부가 아닌 피부 내부로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이처럼 몸의 말단부터 머릿속까지 지끈지끈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잠들면 무언가 다른 것이 깨어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저 문고리가 부서져 닫히지 않는 현관문 밖을 이따금 경계하듯 바라볼 뿐이었는데 대피소로 가지 않고 남은 이웃 주민들은 그가 계단이며 복도까지 남겨놓은 각성의 흔적들을 두려워하며 일절 접근하지 않았다. 숨죽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는데도 조금 열린 문, 그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송태원은 이틀째 오후에야 자신이 있는 층을 일시적으로 봉쇄했다는 안내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잘못 쥐어 망가뜨린 후 아무 것도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묻은 피가 불편하게 굳어버린 제복을 그대로 입고 현관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여전히 같은 속도로 기우는 햇빛이 어딘가 믿겨지지 않았다. 조금은 늦거나, 빠르게, 혹은 반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닌지 그런 상념을 떠올리다, 다시 찾아온 밤중에는 유난히 크게 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하나만을 생각했다. 내가 다시 그럴 수 있을까? 깨끗이 씻고 밥을 먹은 뒤 깊은 잠을 자는 일을······. 그런 일상을.

 

삼 일째 되던 날, 송태원은 꿈을 꿨다. 그러니까 문득 지친 정신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들고 만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더럽고 찢어진 제복 차림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어린 아이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에게 몸을 날리는 중이었다. 송태원은 부드럽게 공중으로 도약하여 정확한 힘을 실은 손으로 놈의 머리를 답삭 움켜쥐었다. 그러자 두터운 갈기 너머로 단단히 자리한 놈의 머리뼈가 산산조각 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래, 공갈빵처럼.

척추를 따라 검은 그림자가 활기를 싣고 몸을 달구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이틀간 그렇게 집요할 정도로 어렵고 아프더니, 이제야 손등으로 옮겨간 귀라도 되는 듯 가시적이며 수월하다. 자신도 모르게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 그를 향해 부서지고 있는 늑대의 아가리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 태원아.”

 

“······.”

 

“태원아.”

 

그건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깨어났을 때 송태원은 자신의 스킬들이 더 이상 제멋대로 날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각성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굳이 무언가를 시험 삼아 쥐어보거나 할 필요도 없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 남아있는 문고리를 끈으로 고정해 임시로 문을 닫았다. 제복을 벗어 비닐에 여러 겹 감싼 뒤 다용도실에 넣어 놓고 욕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오랜만에 씻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단히 밥을 차려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중 틀어본 TV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10여 개국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한국의 첫 던전 공략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나절 만에 성공적으로 공략을 마치고 나온 각성자들은 각자 매우 흥분한 기색으로 요란하게 현장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혼자 조용히 작은 돌 같은 것을 손 안에서 굴리고 있던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마이크가 넘어갈 때 즈음 송태원은 식사를 마치고 TV를 껐다.

그는 설거지를 한 뒤 밖으로 나가 다시 핸드폰을 맞췄다. 신장이나 발 사이즈가 전보다 조금 더 커진 걸 알았기 때문에 근처 상가에 들어가 겉옷과 바지, 신발을 사고 마지막으로 가장 가까운 동사무소에 들렀다. 직원에게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제가 유일한 친족입니다만, 사망 신고가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간소한 장례를 치르고 송태원은 평소처럼 출근했다. 한국은 그 성정답게 빠른 속도로 안정화되었고 비록 더 이상 이전 같은 역할을 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경찰서 역시 여전히 존재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각성한 것도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갈 직장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지구대 사람들은 그 날의 쇼크로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이 송태원에게 있어 퍽 운 좋은 일이었다. 규모는 줄었지만 지구대는 다시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고 재건하는 와중에 대형 좌경은 어디론가 치워져 보이지 않았으며 송태원은 그곳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사십일을 웅크리고 살았다.

 

─그 사이에 축구 국가대표 최석원은 헌터협회 기록 상 한국 제 1호 S급 헌터로 등록되었다. 이후 차례로 전지훈련 중 단체로 각성한 운동선수들 가운데 문현아, 던전 브레이크로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다가 각성한 윤경수에 이어 한유현이 검은 불꽃으로 사방을 녹이며 한국 5번째 S급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마쳤다. 제법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모든 틀은 빠르게 갖춰져 갔다. 세성 길드가 정부와의 협의 끝에 결국 동작역 부근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윤경수, 최석원은 각자 질세라 길드명을 확정지은 뒤 상급 각성자를 모으고 있으며 문현아 역시 기업과 협력해 길드를 만들겠다 선언한 기사가 연이어 올라왔다. 가장 어린 한유현이 과연 어느 길드로 영입될 것인가도 대중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하루가 다르게 규모를 키워나가는 신생 길드들에 비해 이들과 견주어야 할 헌터 협회에 대한 여론은 점점 더 회의적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송태원은 퇴근 후 자주 들르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집 근처 각성자 등록기관을 찾아갔다. 제시된 종이에 스탯과 스킬을 적어 건네자 직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허억, 하고 짧은 탄식을 뱉었다. 직후 상급 스탯 측정기를 통해 근력 스탯이 가볍게 100을 넘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본격적으로 기관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기관에 상주하고 있던 협회 소속 기자들과 진행한 긴급 인터뷰에서 송태원은 앞으로도 계속 공직에 머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집 앞까지 따라붙는 기자들에게 목례한 뒤 평소처럼 씻고, 책을 좀 읽다가 일찍 잠들었다. 같은 시간 한국 6번째 S급의 등장과 공직에서 머물겠다는 그의 소신발언으로 뉴스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지만 송태원은 그가 항상 바라듯, 안온한 저녁을 보냈다.

 

 

 

“오랜만이에요.”

 

만찬회장에서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 주다연은 몇 달 사이 머리색을 오렌지처럼 물들였고 키 역시 조금 더 자라있었다. 때문에 송태원은 자칫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어쩌면 하얀 조깅화 대신, 정장에 어울리는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4월 1일에 ㅇㅇ타워 앞에서. 기억나요?”

 

“금요일이었죠.”

 

“저번에 뉴스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각성은 그때 했으면서 등록을 왜 그렇게 미뤘어요?”

 

송태원이 별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전 세성에 들어갔어요. 스텟을 A 턱걸이 수준이었지만 스킬이 꽤 잘 나와 줘서 눈에 들었죠.

 

“세성길드장이 보내서 온 겁니까?”

 

그의 물음에 주다연은 잠시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가 난처한 듯 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티 없이 활짝 웃던 얼굴보다 그 편이 더 속 편해보였다.

 

“그런 사람이거든.”

 

“······.”

 

“근데 진짜로··· 번복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곤란한 듯 볼을 긁던 그녀는 ‘어쩔 수 없지, 그럼.’ 하고 중얼거리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번에 새로 뽑은 명함이나 줘요. 그거라도 갖다 드려야지, 뭐.”

 

“예.”

 

하얀 명함을 받아든 주다연이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동안 별 것도 없는 명함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조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진짜 죽으려고 했어요?”

 

“아닙니다.”

 

여자의 기다란 눈이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응시했다. 찔러나 보라는 성현제의 오더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굳이 얼굴을 맞댈 일은 없었을 텐데. 화려한 금빛 조명 아래, 시큐리티가 만찬회장에 간신히 들여보낼지 말지 잠시 고민할 만큼 검소한 양복 차림의 송태원은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인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 옷에 탄흔을 발견하고 참담한 얼굴로 말없이 돌아서던 그 뒷모습과.

주다연은 제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송 실장님!”

 

“예.” 곧바로 뒤도는 심각한 얼굴에 대고 그녀는 툭 던졌다.

 

“그 애, 집에 잘 돌아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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