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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Toxic

작은 양과 괴물 둘은 던전을 돌기에는 적절치 않은 조합이었다. 송태원은 착잡한 마음으로 먼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한유진이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고, 성현제의 상태가 오늘 꽤 괜찮아 보였으며, 긴급 던전 브레이크가 아니었다면 그냥 둘 다 떼어놓고 왔을 터였다. 어쨌든 송태원의 뒤를 세성 길드장과 한유진이 따랐다.

 

입장하자마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기묘하게도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높았고 간간히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녹이 슨 슬레이트 지붕과 군데군데 핀 잡초, 낮은 층수의 집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였다. 그 주변에는 앉아서 쉬고 갈 만한 딱딱한 벤치가 놓여 있었다. 바닥은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흙길이다.

성현제가 가죽 구두로 톡톡 페인트가 벗겨진 벽을 두드리며 썩 즐겁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미있는 배경 설정이군. 난 이런 던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의 기억 속이라도 되는 건가?"


일단 나는 아닐세. 성현제는 괜히 벽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뒀다. 던전 안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한유진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는 잠깐 집 가까이로 다가가 까치발을 들었다. 손을 뻗어 슬레이트를 만지자 무해한 녹이 가득 묻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시골에 놀러 간 적은 있었어도 이런 곳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제 기억도 아닌 것 같은데요. 르네상스풍의 던전은 꽤 발견된 적이 많았으나 완연히 한국을 닮은 모습의 던전은 처음이었다. 셋은 마을 중앙으로 걸어왔다. 족히 삼 미터가 넘어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에는 오래되어 다 삭은 금줄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금산리

금산리? 한유진이 그 단어를 읽으며 유심히 생각하고 있을 때 송태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몬스터에게서 한유진을 보호하기 위해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제가 처음 순경 발령을 받았던 지역입니다."

Non Toxic

그 말을 듣자마자 성현제가 크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군. 송 실장의 기억 속이라는 거잖나. 확실히 던전에 들어온 누군가의 기억을 반영하는 던전인 것 같았다. 한유진은 힐끔 송태원을 훔쳐보았다. 송태원은 전혀 재미있지 않은 표정으로 더 말을 잇지 않고 던전 부산물로 된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던전 안은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월요일 여섯 시 반에 방영하는 시골 탐방 프로그램 속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송태원과 성현제는 사무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세성에서 던전 탐사에 도움을 줬다고 하더라도 선지분 확보를 선약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산골짜기에 내가 탐내는 것이 있을지나 모르겠군. 한가로이 말을 잇던 성현제가 자신의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은신을 쓰게."


몬스터의 기척은 송태원도 엇비슷하게 느꼈다. 한유진의 흔적이 사라지는 느낌과 동시에 4급이 될까 말까 한 야생 멧돼지가 한 무더기 튀어나왔다. 보통 멧돼지보다 커다랗고 튀어나온 이빨이 날카로운 것 빼고는 다를 바 없었다.

근접 전투계인 송태원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수첩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장 근처에 있던 멧돼지부터 한 방 후려갈겼다. 뼈가 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며 피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후방은 성현제가 맡았다. 아름다운 권능이 휘황한 빛으로 꽂혀 몬스터의 뇌수를 쪼갰다. 검은 잔상이 진득하니 남았다. 한 무리를 해치웠을 때 한유진이 지우개 취소를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송 실장님이 계시던 곳에는 멧돼지가 많이 나왔나 보네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입니다."


그런 곳이었다. 송태원은 마을 너머를 바라보았다. 빽빽한 산림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가장 많이 다니는 버스는 하루에 세 번이었다. 시내에 나가려면 두 시간이 걸렸다. 반경 오십 킬로미터 안에 마을 주민이 백 명이 넘지 않는 탓에 작은 파출소에는 순경이 셋밖에 없었다. 처음 멧돼지가 나왔을 때 순경 셋이서 그놈을 처리하겠다며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났다. 결국 어떻게 잘 몰아서 죽이지 않고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날은 몸이 떨려서 잠이 안 왔다.

전신이 으깨지거나 까맣게 타 들어간 멧돼지들을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송태원은 한유진에게 한 소리 보탰다. 은신을 풀지 마십시오. 피해 무효화 아이템이 한가득인데요,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유진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번에는 고라니가 튀어나왔다. 사슴과 다른 점은 날카로운 앞니가 돌출되었고, 여인의 울음소리를 크게 낸다는 것 정도다. 몬스터였으므로 보통 고라니보다는 당연히 덩치가 컸다. 몬스터들은 시골집의 벽을 부수거나 바닥을 탕탕 두드리며 싸움을 걸었다. 송태원은 인벤토리에서 무기 하나 꺼내 들지 않았다. 그는 건조한 표정으로 고라니들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급 차이가 나서 많이 두들겨 팰 필요도 없었다. 말끔하던 정장에 피가 묻었다. 고급진 걸음으로 걷던 성현제가 그럴듯한 추측을 했다.


"고라니에 멧돼지, 다음은 팅커벨인가?"


고라니들은 울음소리가 컸다. 야밤에 잠도 못 자게 비명을 질러대는 일은 예사였다. 관사에서 잠을 자던 박 순경이 욕을 크게 하며 돌아누웠다. 막내였던 송태원은 일기를 쓰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냉수로 목욕을 하고 온 윤 순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고라니 새끼들이 토마토를 다 씹어 먹는다고 민원이 엄청 많이 들어와. 그래도 막 죽일 수는 없잖아, 쟤들도 살려고 하는 짓인데…….


"송 실장님?"


성현제와 한유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고라니 사체가 쌓였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속이 메스꺼웠다. 송태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송태원은 쟁반만 한 긴꼬리 산누에나방 하나를 잡아서 손쉽게 찢었다. 불쾌한 색의 체액이 그대로 셔츠에 묻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순경일 때의 이야기를 조금 해 주었다. 동료였던 두 순경은 정이 많았고 어려운 시골 생활에서 막내를 잘 챙겨주었다.

그리고 둘 모두 초기 던전 브레이크 때 시민들을 살리겠다며 앞장섰다가 죽었다. 승진 기회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고 술을 먹으며 장난스레 한탄하던 동료들은 순직한 뒤에 2계급 특진을 받았다.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죽음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버티기 어려운 세계를 끊임없이 살아가야 했다. 송태원은 각성하기 전부터 자신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각성하고 나니 더욱 불완전해졌다. 그는 몸에 독을 품었다. 괴물들은 모두 독이 흘렀다. 무감각해져 타인을 끊임없이 오염시킬 마비 독이었다. 그의 곁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작은 상자가 있었다.

퍼덕거리는 나방의 날개를 꽉 눌러 밟은 성현제가 차분하게 말했다.


"무언가 오고 있군."


등장한 것은 할머니였다. 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하고 선량해 보이는 할머니의 두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노인들이 자주 입는 펑퍼짐한 꽃무늬 바지에 윗도리는 편한 티셔츠였다. 한유진은 이 끔찍한 던전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드디어 이해했다. 성현제는 무감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송태원이 공허하게 말했다.


"근무하는 동안 가장 저를 아껴주셨던 분입니다."


잊을 수가 없는 기억들이 들쑤셔지고 있었다. 시꺼먼 독으로 젖어 들었다.

아유, 이름이 태원이인가~ 이름도 잘났네. 우리 꽃 같은 손녀가 이제 열아홉이여. 한 번 만나보면 어떨랑가? 여기 고들빼기랑, 고추짱아찌랑, 장조림이랑 해왔어. 이거 좀 먹어 봐. 젊은 총각들이 멀리까지 와서 고생이 많어. 마을 주민들이 모두 잘해주긴 했지만 노인은 개중에서도 송태원을 가장 아꼈다. 밥도 많이 먹이고, 명절에는 음식도 해서 관사로 가져왔다. 연차가 차서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펑펑 울고,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건강하라며 인사를 해주던 할머니였다. 송태원은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계속 울었다.

그래도 몬스터다. 성현제가 손을 뻗으려는 것을 한유진이 막으며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붙박이처럼 멈춰선 송태원을 쳐다보던 성현제가 냉랭하게 말했다.


"송 실장은 움직일 수 없어."

"아뇨. 잠깐만요!"


한유진은 송태원의 심정이 미칠 정도로 이해됐기 때문에 도저히 성현제가 스킬을 쓰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유진의 손목에 걸려 있던 반투명한 팔찌의 모습이 연한 푸른빛을 띠는 장난감 총처럼 변했다. 한유진이 그녀에게 총을 겨눴다. 성현제가 이마를 짚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더니.

한유진이 든 총에서 푸른 산탄이 발사되었다. 몬스터가 맞고서 풀썩 쓰러졌다. 송태원이 잠시 한유진을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반사적으로 앞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성현제가 그를 강한 악력으로 붙잡았다.


"누구보다 과거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으면서 가장 처절하게 기억 위에서 헤엄치고 있었군."


송태원이 노려보았을 때 눈앞에 뜨는 공포 저항 메시지가 어찔했지만 한유진은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여기서 성현제가 그녀에게 손을 댔다면 당장 전쟁터가 됐을 게 분명했다. 송태원에게 성현제는 괴물의 정점이고, 독의 바운더리 극상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성현제를 말렸다. 차라리 제가 하는 게 나았다. 한유진의 손목 근처에서 다시 파랑새가 느리게 날아다녔다.


"아뇨. 죽이지는 못했어요. 잠깐 기절시켰습니다."

"………."

"저도 송 실장님과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소중한 기억이요. 아마 제게 유현이가 소중했던 것처럼 송 실장님께도 그분이 소중한 분이었겠죠. 몬스터라도 말이에요. 저도 같은 상황이라면 유현이를 죽일 수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도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일정 개체 수 이하가 되면 보스 몬스터가 나오잖습니까.

그래도 총을 겨눈 건 죄송해요. 한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송태원의 마음속에 끓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는 이 작고 약한 양을 바라보았다. 이내 쓰러져 잠들어 있는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정이 좀 됐나?"

"예."


여기 등장한 것을 보면 그 할머니도 돌아가셨을 테지만 어느 누구도 입 밖으로 굳이 그 사실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뒤에도 송태원이 순경 시절 만났던 마을 주민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성현제도 가망 없는 의식에 동참해서 감전된 티가 나지 않도록 적당히 기절시켰다. 송태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다행히 초반에 잡았던 몬스터 수가 많아서 곧 보스 몬스터를 볼 수 있었다.

 

금산리의 마을 회관 앞에서였다.


한유진은 무심결에 헉 소리를 냈다. 문득 생각이 났다. 송 실장님의 아버님, 던전 브레이크로 돌아가셨다고 했나.

성현제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는 혀를 차며 한유진의 옷 뒷덜미를 붙잡고 덜렁 들어 올린 뒤 대충 다섯 걸음 정도 물러섰다. 달갑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건 사절이었다. 시시한 수준의 B급 던전에서 유능한 파트너를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괜찮은 전투를 하지 않았으므로 성현제의 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한유진을 꽉 쥔 채 선뜻 나서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나타난 보스 몬스터는 이번에도 인간형이었다. 오십 대가 넘어 보이는 나이의 인간 남자는 짙은 눈썹과 건장한 체격, 매서워 보이는 얼굴을 가졌다. 왠지 누군가가 쉽게 떠오르는 이목구비다. 송태원은 별 반응 없이 거의 감정이 사라진 표정으로 그와 똑 닮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물밀 듯이 몰려 들어왔다

그때 남자가-아니, 보스 몬스터가 입을 열었다. 아주 흐리고 작은 목소리지만 그 부름만은 선명하게 울렸다.


"태원아."


그러나 도저히 어떤 타이밍일지 모를 순간에 그의 죽은 눈이 반짝 기운을 찾았다. 송태원은 괴리를 발견했고, 놓치지 않았다.

깨진 균열에서는 자그맣게 빛이 흘러나왔다. 송태원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비각성자 대응을 위해 차고 다니던 총을 덜걱 뽑았다.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안전장치를 뽑고 총구를 겨눴다.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방아쇠가 당겨지며 탕, 하는 차가운 소리가 울렸다. 화약 냄새가 진하게 났다. 쓰러진 남자의 머리가 피로 물들었다. 그는 다시 총을 건 홀더에 집어넣었다.


"저희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는 몬스터를 으스러뜨리기 위해 송태원이 천천히 손을 풀었다. 이 기억과도 작별이다.
바라지 않았던 방법이긴 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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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드리는 거 진짜 진부한 거 압니다. 아는데. 송 실장님은 누구보다 생명을 소중히 하시는 분이에요."


포기하지 마세요. 한유진이 푸른색이 일렁이는 던전 게이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송태원의 트라우마가 심하게 남을까 봐 많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의 아버지가 등장했던 마지막 순간에 송태원은 알았다. 모든 것들은 그저 기억의 찌꺼기일 뿐이며, 심지어 제 기억을 완벽하게 재생시키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송태원은 쉽게 벗어났다. 방향은 둘째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변화한다.


"한유진 씨가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뭔가를 열심히 쓰던 송태원이 한유진을 바라보더니 유쾌한 독성 물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세성에서 이 B급 던전에 대해 요구할 지분은 몇 퍼센트입니까?"

"탐사를 다시 해 보고 판단하고 싶군."


송태원은 대충 정리가 끝난 수첩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유진은 각성자 관리실장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늘 송태원의 기억을 엿봤다. 그 스스로를 얼마나 커다란 재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는 혼자 해독하려고 애썼고, 지금도 애쓰고 있거나, 혹은 무해한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면 송태원은 불완전한 독이 아닌가.

 

 

 

그의 미련과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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